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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제철인 영화는 뭐니 뭐니 해도 화려한 액션으로 무장한 블록버스터와
피비린내 물씬 나는 공포영화다.
올해 블록버스터는 이미 개봉한
‘엑스맨2’ 와 ‘매트릭스2-리로디드’를 비롯해 ‘터미네이터3’
‘툼레이더2’ ‘나쁜 녀석들2’등 주로 후속편들의 잔치에 우리에게
낯익은 주인공 ‘헐크’도 동참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공포영화는
주로 한국영화가 뜨거운 경쟁을 펼칠 전망인데 ‘장화, 홍련’
‘4인용 식탁’ ‘여우계단’ ‘거울 속으로’ ‘아카시아’등이
우리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공포영화는 대박을 기대하고 개봉하는 것은 아니다.
계절의 구색을
맞추면서 어느 정도 제작비를 상회하는 흥행만 하면 목표 달성이다.
진짜 전쟁을 치르는 것은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 상상을 초월하는
시각적 화려함을 앞세워 몰려오는 블록버스터들이다.
아마도 올 여름도 예외 없이 관객의 발걸음은 대부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쪽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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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름을 정복하러 몰려오는 이런 블록버스터와 호러물들의 틈바구니에서 봄에 개봉해 여름까지 롱런할 기세를 보이고 있는 대견한 한국영화가 있다.
바로 세간의 화제 ‘살인의 추억’이다. ‘살인의 추억’은 이미 전국 수백만 관객을 동원했고 연일 언론에서도 호평 일색의 기사를 내걸어 거의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기 까지 이르렀으니 이 영화가 어떤 영화고, 이 영화의 소재가 된 화성연쇄살인사건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는 해봐야 진부할 뿐이다.
(인터넷 검색 창에 ‘살인의 추억’을 치면 웬만한 정보는 다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이번엔 ‘살인의 추억’과 공통점이 있는 다른 몇 편의 영화를 함께
만나보면서 이전에 별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경향을 주목해 보려고 한다.
‘살인의 추억’은 연쇄살인을 다뤘지만 공포영화는 아니다.
영화가 상당한
웃음을 자아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코미디도 아니고, 실제 사건을 다뤘다고
해서 다큐는 더더욱 아니다.
장르가 모호한 것은 벌써 이 영화의 제목에서
나타나 있다. 살인이라는 끔찍한 단어와 추억이라는 낭만적인 단어의 조합,
아이러니 같기도 한 이 제목은 사실 어찌 보면 섬뜩하기도 하다.
범인을
잡지 못한 형사가 세월이 흐른 뒤 살인범에 대한 단서를 접하고는 ‘미치도록
잡고 싶었던’ 그때를 떠올리는 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고 관객들도
여기서 ‘살인의 추억’이라는 제목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데, 여기서 ‘살인의
추억’은 형사의 추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에서 한 꼬마의 증언으로
말해지는 살인범이 다녀갔다는 사실, 그 살인범이 “내가 예전에 한 일이
떠올라서 다시 와봤다는” 말을 남겼다는 사실이 바로 ‘살인의 추억’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형사의 범인 추적에 애쓰던 과거의 추억이 아닌 살인범
자신이 지난 살인행위를 추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원한관계나 우발적 충동으로 사람을 죽여 놓고 훗날 그것을 추억하지는 않는다.
추억이란 그리움의 감정이 섞인 회고이며 일련의 성취에 대한 미련이다.
잡히지
않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어딘가에서 자신이 저지른 일을 추억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설정은 극중 형사뿐 아니라 전 국민에게 살인범에 대한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이 영화를 만드는 일 자체가 범인에 대한 응징의 시작이었다는
봉준호 감독의 말은 가슴에 와 닿는 바가 크다.
“살인은 동기의 문제가 아니라 기질의 문제야” 추리작가 반 다인의 소설에
등장하는 탐정 파일로 반스가 한 말이다.
살인범의 범행 동기에 집착하다
보면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지적에 다름 아니다.
‘살인의 추억’이 살인을 다룬 기존 영화들과 비교해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살인범의 정체가 끝까지 밝혀지지 않고 사건이 미궁으로 빠진다는 사실이다.
또, 범인이 살인을 저지른 동기도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이점은 이 영화의
많은 미덕 중에 중요한 하나다.
한때 살인범을 등장시키는 공포 또는 스릴러영화에서 유행한 것은 한 인간이
살인범이 된 이유를 심리학 또는 정신분석학적 접근으로 파헤쳐 보는 것이었다.
살인범은 대체적으로 어려서 성장하면서 부모나 주위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서
좌절을 자주 경험하며, 그 과정에서 자기를 못났다고 그리고 나쁘다고 보는
자책감과 죄책감, 그리고 그 누구를 증오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 증오심은
뒤에 그대로 그의 무의식에 남아 있게 되므로 살인이라는 충동적 행동의 직접적
원인이 된다는 등의 해석이 그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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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의 구구 절절한 주석이 딸린 ‘살인 영화’는 지금은 결코 관객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
불우한 환경에 의해 평범한 인간이 살인범이
될 수도 있고 그것은 막을 수도 있었다는 권선징악-사필귀정적
코드는 진부한 경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 살인범이
살인을 저지르는 데는 어떠한 이유나 동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살인범이 그냥, 이유도 없이 죽이고 싶어서
죽인다는 것을 대부분 잘 알고 있다.
지난해 국내 개봉했던 ‘프롬 헬(From Hell)'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악명 높은 연쇄 살인마 <잭 더 리퍼>를
소재로 한 영화다.
잭 더 리퍼는 1888년 10주간에 걸쳐
여성들을 끔찍하게 난자하고 유유히 사라진, 아직까지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전대미문의 살인마다.
이 영화는 잭 더 리퍼에 관한 숱한 소문과
의혹 속에서도 가장 인기 있었던 왕실과 관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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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된 스캔들을 지목해 미스터리를 해결하고자 시도했는데,
몇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의 배경은 화성연쇄살인사건과 100년의 시간차가
있다는 것, 그리고 화성 살인은 10차까지 발생했는데 잭 더 리퍼는 10주
동안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 그리고 희생자는 모두 여성이었다는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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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를
토대로 했다는 점, 범인은 아직까지 잡히기는커녕 밝혀지지도 않았다는
공통점에서 바라봐도 ‘살인의 추억’과 함께 비교하면 흥미로운
점을 많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살인범이 끝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살인의 추억’과
비슷한 영화가 6월 13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바로 ‘폰 부스(Phone Booth)'라는 영화인데, 이 작품은 공중전화를 이용한 한 사내가 부스에서 나오려 하자 정체 모를 저격범이 전화를 걸어 "나오면 쏴 죽이겠다”라고 협박하는 상황을 그린 것이다.
대치상황의 긴박감과 도대체 저격범이 누구며 왜 살해 협박을 하는지
궁금증이 증폭되어 가는 과정에서 지루함은 결코 느끼지 못할 괜찮은
영화다.
영화의 끝부분까지 저격범의 얼굴은 물론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데, 이런 영화의 특성상 미리 중요한 부분을 알려줘 흥미를
반감시키는 발설(요즘엔 이것을 스포일러라고 함)은 하지 않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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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캔디 케인'은 두 형제가 자동차 여행 중에 장난 무선통신으로 놀린 정체불명의 트럭 운전사와 조우하면서 겪게 되는 위험천만한 모험을 그린 스릴러물로서 스필버그의 소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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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결>의 젊은이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로 B급 스릴러물의 전통을 잘 따르고 있는 영화다.
영리하면서도 치밀한 시나리오를 무기로 한 이 영화에서도 두 형제를
죽이려고 쫓아오는 공포의 대형 트럭 운전사의 얼굴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보기 힘들다.
얼굴도 모르고, 정체도 모르고, 왜 그러는지 이유도 모르는 살인을
다루는 영화가 남기는 스산한 여운은 신체를 동강내고 피를 쏟아
붓는 영화 보다 훨씬 크다.
그것은 살인범이 응징을 당하고 죽고
끝나는 유형이 하도 많이 반복되어 이젠 식상하기 때문인 이유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위험에 항상 가까이 있는 현대인에겐 정체불명의
살인마가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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